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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 "칠순에 떴다우" 마포 라디오 스타(연제은 고문님)
작성일시 2009-10-09 작성자 관리자
"칠순에 떴다우" 마포 라디오 스타
한국일보 | 입력 2009.10.06 02:35

서울 지역공동체 방송 마포FM `행복한 하루` DJ콤비 연제은-박영자씨
"연애때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"
"저한테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은…"
아웅다웅 입담속 추억·인생 녹여내
"열정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죠"



↑ 매주 수요일 오전6시라디오 방송을 녹음 중인 연제은(왼쪽), 박영자씨가 30일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. 류효진기자 jsknight@hk.co.kr
지난달 30일 오전 6시, FM라디오 주파수를 100.7MHz에 맞추자 1950년대 유행가 `만리포 사랑`이 시그널 음악으로 잔잔하게 흘러나왔다. 곧 뒤를 잇는 DJ들의 오프닝 멘트. "새벽 바람이 차가운 것이 정말 가을이 온 것 같아요." 여성의 목소리는 은은하면서 맑았다. "맛있는 냄새 때문에 가을의 정취를 더 느끼는 것 같아요."낮게 깔리는 남성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은근슬쩍 익살끼도 담겨 있다.

"연 선생님, 신수가 좋아지셨어요"(여성 DJ) "그러게 말입니다. 말도 살찌고 저도 살찌는 요즘입니다." (남성 DJ). 아침을 깨우는 두 DJ의 대화는 토닥거리는 연인이나 부부 같다.

"건강에도 유의하셔야죠. 지난주 건강상식에서 배운, 물 많이 드시는 것은 잊지 않으셨죠?"(여성 DJ) "훌쩍, 이렇게 한 컵 들이켜면 되는 거죠? 영자씨 잔소리가 부쩍 늘었단 말이에요." "어머, 이게 왜 잔소리예요. 다 선생님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요." "그래요, 나 챙겨주는 건 우리 영자씨밖에 없어." 두 DJ의 정담 뒤로 현인의 `신라의 달밤`, 남일해의 `빨간구두 아가씨` 등 아련한 옛 트로트 가요들이 세월을 잊은 듯 이어졌다.

서울 마포구 지역에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찾아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영자(69) 할머니와 연제은(71) 할아버지. 2005년 마포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개국한 지역공동체 방송 `마포FM` (www.mapofm.net)의 실버 프로그램 `행복한 하루`의 명콤비 DJ들이다.

이들은 청춘의 꿈을 뒤늦게 이룬 늦깎이 아마추어 방송인이지만, 마포 FM 개국 멤버로서 벌써 4년째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이다.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동안 방송되는 `행복한 하루`를 번갈아 진행하는 4개 실버팀 중에서도 가장 활동을 오래해 고정 청취자가 적지 않다.

이날 오후 마포구 동교동에 자리잡은 `마포FM` 방송국에서 만난 두 어르신들은 라디오 방송처럼 유쾌하면서 정다웠다. "핑크색 옷을 입으니까 오늘 따라 더 예쁘네. 안 그래도 예쁜데 화장은 왜 고쳐요?"(연씨) "카메라 왔는데, 예쁘게 하는 게 예의죠."(박씨) 연씨의 은근한 농담에 박씨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엔 연신 소녀 같은 웃음이 가득했다.

이들 콤비의 방송은 장난기 어린 수다로 가득하다. 연씨가 "연애할 때 하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예요"라고 `인생 교훈`을 설교하면, 박씨는 "그럼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거짓말이셨다는 거예요?"라고 되받으며 아웅다웅하는 식. 그 수다는 그러나, 젊은 시절 추억에서 60여년 삶의 무상함과 노년의 생활까지 어우러져 어느 라디오 방송보다 웅숭깊다.

방송국 반경 5km 이내 마포와 서대문 일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출력 방송이지만, 두 어르신은 어엿한 `라디오 스타`들이다. 연씨는 "청취자들 중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와서 한 번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는데, 다들 40~50대인 줄 알았더니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고 하더라"며 환하게 웃었다.

박씨는 "노인복지관 친구들이 `방송 재미있게 듣고 있다`는 얘기를 수시로 해줘서 힘이 난다"며 "방송을 듣다 보면 옛날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다고들 한다"고 말했다.

각각 기업체 컨설턴트로, 행정직 공무원으로 반평생을 보낸 뒤 은퇴한 연씨와 박씨는 2005년 가을 마포노인종합복지관에 나붙은 `라디오DJ 구함`이란 공고문을 보면서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지폈다. 뒤늦게 이룬 꿈이다 보니 열정은 더없이 뜨겁다. 무보수의 자원봉사지만, 4년 동안 방송을 거른 적이 한 번도 없다.

박씨는 "일주일에 한 시간 나가는 방송이지만, 평소에도 신문과 책을 꼼꼼히 챙겨 읽으면서 모든 생활을 방송 준비에 할애한다"며 "초등학교 4학년 손자가 우리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다며 자랑스러워할 때면 `내가 아직 필요한 존재구나` 싶어 뿌듯하다"고 말했다.

`행복한 하루` 담당 PD 박상미(26)씨는 "두 분은 방송뿐 아니라 마포FM 총회 등 관련 모임에도 가장 참여율이 높다"며 "젊은 사람보다 에너지가 더 넘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덩달아 힘이 난다"고 말했다.

지역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은 `마포 FM`을 비롯해 전국에 모두 7개. 2005년 정부 시범사업으로 시작됐으나 올해 1월부터 정부 지원금이 끊기면서 지역 광고 등을 통해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.

`마포 FM` 관계자는 "지역공동체 라디오의 생존은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에 달려있다"며 "어르신들의 열정이 마포 FM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"고 말했다.

강윤주기자